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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단편

20131024

논지 전제) 예술의 역할을 사회적 계몽이라고 한다면. 

 

현안 문제) 이전까지 예술은 예술가의 손에서 완성됐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예술가를 넘어, 관객의 손에서 완성된다. Interactive Art가 그 예다. 이는 예술가가 예술에 대해 갖는 절대적 위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이유) 예술가가 주제를 일방적, 독선적으로 전달하는 경우. 이는 대중은 일방적 수용자다. 그러나 Interactive Art는 이것이 아니며, 주제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그리고 주제는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 예술가-관객의 소통, 넓게 보면 인간관계의 소통이 그 주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Interactive Art의 표현 방식은 적절하다.

비판 1) 그렇다면 이제 예술가가 갖는 역할은 무엇인가. 대중을 계몽하고, 사회적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현안 문제들에서 멀어진다.

반박) Interactive Art, 혹은 설치미술, 공연 예술로도 현안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시위 장소에서 예술 활동을 함으로써 예술가의 정치적, 사회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재반박 1)그러나 이 예술은 한바탕 놀아보자는 성격이 강하다. 즉 비판보다 유희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것 자체로 순수하게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는 소리는 즉 파급력과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재반박 2) 그러나 그것은 그 시공간에 국한된다. 대상 또한 시위대에 국한되며, 인터넷 매체로 퍼진다 해도 그 범위는 좁다. 보다 넓은 범위, 대중 전체에게 향하는 목소리는 줄어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가는 폭넓은 비판의 역할을 상실한 건가?

재2반박) 계몽 범위를 대중으로 잡는 것은 너무 넓다. 보다 좁은 범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재3반박 1) 전체 대중은 계도하기 어렵다. 대중은 우매하니까. 흐르는 대로 흘러가며, 현 시대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재미있는 것만을 찾고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디서 그런 비판론을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따위의 인신공격과, ‘그냥 흘러가면 되는 거지’하는 현실 안주적인 사고가 팽배하다. 이는 대중이 사회적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3반박 2) 그렇다면 예술이-1 대중 전체를-2 계몽하기 위해서-3는 어떻게 해야 하나? 차라리 사건(이벤트)을 일으키고, 그것을 사회적 이슈화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성재기의 사망 때처럼, 대중은 휩쓸리는 대로 휩쓸린다. 그렇다면 그 속성을 이용한다면?

재4반박) ‘재3반박 2’는 단기적 방법이다. 그러나 재2반박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좁은 범위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장기적 방법이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과 함께 나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실효가 있을 지는 의문이다. 대중이 발전하는 것만큼 사회적 통치 수단 또한 발전할 테니까.

 

비판 2) 이전 예술은 진입 장벽은 높았으나, 그로써 얻게 되는 내용 수준 또한 높았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진입 장벽은 낮고, 얻게 되는 내용 또한 낮다. 접근성은 확대되었지만 비판 기능은 줄었다. 그 근거는 예술의 장벽이 허물어진 현 예술 사조다. 놀이, 여타 어떤 활동도 예술과 구분되는 기준이 없다. 예술가가 원하면 뭐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

반박) 그렇다면 예술품 본연의 의미, 가치는 퇴색된다. 예술은 일상 속으로 들어오나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수용자는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한다. 결국 양적 대중성은 확보되었으나 질적 심화성은 소수만 향유할 뿐, 대중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설명을 듣고 심도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과거의 예술이 더 낫지 않을까. 그 때의 예술은 최소한 사회적 계몽의 기능은 수행했다.

재반박) 그러나 이처럼 심도 있는 사회적 논의, 비판은 현 시대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대중이 외면하는 바다. 실제로 대학생은 등록금 문제를 알고 있지만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월가 시위는 반짝 해프닝으로 끝났다. 과거에는 집단이 모여 규합했을 문제를 두고 이제는 규합하지 않는 것이다. 국내 대학생 과반수가 휴교 동맹을 맺는다면 등록금 문제에 있어 반전을 가져올 수도 있건만 그러지 않는다.

 

재반박 내용의 이유) 나를 보자면, 나는 문제를 느낀다. 해결할 필요성도 느낀다. 그러나 먼저 나설 용기가 없어 나서질 않는다. 즉, 내가 총대를 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대중 속으로의 숨는 세태는 사회 계층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결책 1)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일단 과거에서 찾아보자. 반문화Counter culture가 있겠다. 히피, 락 문화와 같은 것들은 사회 기득권층, 기존의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 체제 밖에서 그것을 거부하며 싸운다. 이들은 실제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해결책 2) 체제 밖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에서 싸우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체제 내에서 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의 논리로 사회를 무너트리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며, 사회적 논리에 포섭될 가능성 또한 크다.

 

정리 1) 예술이 이 반 문화의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왜 이런 선구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인가? 왜 Interactive Art와 같이 대중과의 소통을 꾀하면서도, 소통의 ‘내용’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가? 만일 생각한다고 쳐도, 왜 그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가? 예술가가 적극적으로 사상을 전파하는 독선적인 면모는 왜 나타나지 않는가? 포스트 모던적 흐름 때문인가?

정리 2)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감소하고 있다.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이는 예술의 표현방법이 바뀌며 잃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1) 예술가가 자신이 옳다고 믿고, 2) 그것을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배짱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3)그 방법에 있어 파격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하며, 4)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식의 논리보다는, 확실한 사회적 문제에 있어선 독선적일 만큼 행동해야 한다. 5)그렇게 사회의 문제는 혁명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정리 3) 예술가가 생각한 것이 아무리 깊고, 심오해봤자 관객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아무리 자연 환경 보호를 주장해봤자, 예술이 너무나 비-예술(현실과 다를 바 없는)적이라면 관객은 알아차릴 수 없다. 현재는 표현 방식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예술가의 주제 의식이란 독점적 지위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언) 이전의 예술은 맞춤 예술이었다. 주문 제작되는 것이고, 특정 계층에게만 소비됐다. 그렇게 자본과 귀족에서 독립된 예술은 마침내 예술가만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예술가가 취한 행동은 무엇인가. 표현 방법의 다양한 연구였다. 그러나 그 주제의 전달, 대중 계몽에 있어서는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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